2010년 10월 12일 화요일

몽환경구 (梦幻景区) 속으로!

황산 서해대협곡 종주기

모두들 황산에 한번쯤은 가보았겠지만, 황산의 가장 아름다운 비경인 서해대협곡(西海大峽谷)을 완주한 사람들은 많지 않다. 중국 안후이(安徽)성 중부에 위치한 황산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황산의 서쪽에 위치한 서해대협곡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적인 경치라 하여 '몽환경구(梦幻景区)'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길고 까다로운 산행코스와 발 밑으로 보이는 아찔한 절벽이 주는 공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서해대협곡을 가기를 꺼려하지만 서해대협곡이 자랑하는 천상천하의 절경을 한번 맞닥트리면 절대 후회 안 할 것이다.


우선 서해대협곡을 여유있게 구경하기 위해선 적어도 1박2일 여행기로 잡아야 할 것이다. 아침 일찍 상하이에서 출발해 정오쯤 황산에 도착한 후, 운곡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황산의 가장 대표적인 산상 호텔인 북해빈관에 체크인을 한다. 첫날은 무리하지 말고 북해빈관 주위의 시선봉(始信峰), 사자봉(狮子峰) 등을 구경한 뒤, 일몰을 보고 나서 다음날을 위해 미리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일출을 보려면 적어도 새벽 5시반에는 기상하여 700m거리 가량의 길을 걸어서 청량대(清凉台) 또는 사자봉으로 가면 아침 일찍부터 일출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북적일 것이다. 하지만 황산은 구름과 안개가 많고 흐린 날이 많아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것은 일년에 50여 일에 불과하다.


북해빈관에서 서해대협곡 북쪽입구로 향하면 먼저 광명정(光明顶)과 비래석(飞来石)을 보게 될 것이다. 하늘에서 날아왔다는 비래석은 한 번 만지면 관운이 있고, 두 번 만지면 재운, 세 번은 가족운, 네 번은 여자운, 다섯번은 잉태운이 있다고한다. 숲속 길을 조금 올라가면 곧 시야가 터지고 눈앞에 거대한 산수화가 펼쳐질 것인데, 그곳이 배운정(排云亨)이다. 이 정자는 서해대협곡의 깊은 협곡 사이에 올라온 운무가 이곳에 이르러 흩어지면서 주위의 절경을 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배운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의 철제 난간에는 수많은 자물쇠들을 볼 수 있는데, 중국인들이 개인적인 소망이나 남녀간의 사랑을 기원하여 이런 자물쇠를 건다고 한다. 배운정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면 드디어 6km거리의 서해대협곡 코스의 북쪽입구에 도달하게 된다.

서해대협곡 북쪽입구로 들어서면 먼저 인공으로 뚫은 바위굴을 통화할 것인데, 황산의 등산로에는 험난한 바위암봉과 협곡을 잇는 구간이 많아 인공으로 만든 터널과 다리가 많은 편이다. 굴을 빠져나오면 다시 절경이 펼쳐질 것인데, 아까 보았던 비래석이 멀리 보일 것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허공다리’구간이 나와 1m폭도 되지 않는 아찔한 계단들로 이어진다. 깎아지른 절벽 허리에 아슬아슬한 계단길을 걸으며 70여 개의 기기묘묘한 형태의 봉우리와 바위틈에서 자라는 기송(奇松)들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올 것이다. 수직으로 솟은 바위 암봉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고 눈 돌리는 곳마다 절경이 아닌 곳이 없다. 장장 4-5시간이 걸리는 서해대협곡이 끝나면 두 개의 수직 바위를 연결한 구름다리 보선교가 나온다. 그 후, 북해빈관으로 다시 올라가는 힘든 등산길을 택하거나 황산 최고봉인 연화봉(莲花峰, 1864.8m)길을 택할 수 있다. 북해빈관에서 하산하는 운곡 케이블카의 마감시간은 오후 4시반 (신케이블카) 혹은 5시반 (구케이블카)이므로, 미리미리 시간을 잘 짜야 한다.


황산 서해대협곡의 트레킹 코스가 갖춰진 것은 불과 수년 전. 20여년에 걸친 등산로 정비 이전에는 서해대협곡에 누구도 쉽게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고 한다. 1979년에 황산에 올라와 환상의 절경에 감탄한 등소평이 "중국의 남녀노소 모두 황산을 보고 즐길 수 있도록 하여라"는 지시 아래 오늘날의 서해대협곡의 등산로가 만들어졌는데, 12년에 걸친 설계와 9년에 거친 공사 끝에 2001년 서해대협곡 루트가 완공되었다. 서해대협곡의 정상까지 돌계단만 무려 14만개나 된다고 한다. 아찔한 절벽 옆으로 돌계단을 지은걸 보면 다시 한번 중국사람들의 저력을 느끼게 한다.

▶황산 가는 길: 沪昆高速(G60) -> 杭州绕城高速-> 徽杭高速(黄山出口下):약465km
▶입장료: 230 元/성인, 115 元/학생증 지참시 우대가
▶케이블카 이용료 (편도): 80 元/성인, 40 元/우대가

도시 관광버스 운행, 30元으로 上海 일주

15개 관광지 연결, 한국어 등 8개국어로 관광지 안내

10월1일 상하이 도시관광버스가 운행을 시작해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할 예정이다.

도시관광버스는 푸둥과 푸시 2개 노선으로 나뉘어 15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비롯해 상하이의 주요 관광지인 런민광장(人民广场), 난징루(南京路), 와이탄(外滩), 청황묘(城隍庙), 화이하이루(淮海路), 신톈디(新天地), 진마오다샤(金茂大厦), 동방명주 등을 연결해주는 15개 정차역이 설치돼 있다.

요금은 30위엔으로 24시간 내 승하차 횟수에 제한이 없으며 승차권 1매당 신장 140cm이하의 어린이 1명을 동반할 수 있다.

관광버스는 중국어뿐 아니라 한국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등 8개국어로 된 관광지 안내가 있어 여행객들의 관광에 편의를 제공한다.

매년 4월1일부터 10월31일까지의 운행시간은 푸시노선이 9:00~ 21:20분 까지, 푸둥구간은 9:00 부터 19:30분 까지 운행한다. 11월1일~3월31일까지는 푸시구간이 9:00~19:00시, 푸둥구간이 9:00~17:30분 까지 운행한다.

승차권은 관광버스역에서 구입이 가능하고 상하이 춘추항공 여행사 각 영업소 및 공식 사이트(www.china-sss.com/citysight/index.asp), 상하이관광자문센터 등에서도 구매 가능하다.


1 城市规划展示馆(人民大道)
2 南京路步行街(西侧)
3 世纪广场(九江路)
4 南京路步行街(东侧)
5 外滩外白渡桥(南苏州路)
6 外滩海关大楼(中山东一路)
7 外滩浦江游船码头(中山东二路)
8 城隍庙豫园(人民路)
9 上海古城墙(淮海东路)
10 大韩民国临时政府旧址(马当路)
11 一大会址新天地(太仓路)
12 淮海中路商业街(嵩山路)
13 上海博物馆(普安路)
14 东方明珠观博电视塔(陆家嘴环路)
15 金茂大厦(花园石桥路)

2010년 9월 26일 일요일

상해 와이탄 구경하기

 와이탄이 달라졌다. 33개월간의 공사를 마치고 지난 28일(일) ‘신와이탄(新外滩)’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모습을 드러냈다. 개방되자마자 와이탄을 찾은 관광객들로 주변은 북새통을 이뤘다. 하지만 공공 면적 40% 넓어지고 휴식공간이 충분히 확보돼 예전처럼 몸이 부딪쳐 관람에 불편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새단장한 와이탄, 무엇보다 교통이 편리해졌다. 버스 이용은 물론, 지하에 자동차 주차장도 확보돼 이용이 편리해졌다. 예전에는 지상에 횡단보도가 없어 지하도를 이용해야 했으나 중산둥루(中山东一(二)路)를 건너 와이탄으로 향하는 길마다 횡단보도가 설치돼있어 훨씬 수월해졌다.
 
▶시내버스 이용하기 
또한 시내버스가 11대가 와이탄을 통과해 바로 앞에서 하차하면 곧바로 황푸강을 볼 수 있다. 와이탄 15㎞거리에 3개의 정류장이 설치돼있다.
•와이탄역사기념관(북쪽): 南京东路北京东路 하차 37, 33, 55, 65, 305, 307, 317, 330, 921, 928, 910
•페리 승선(중앙): 中山东二路新开河路 하차 33, 55, 65, 305, 576, 868, 910, 928,
•유람선•페리 승선(남쪽): 十六铺 하차 736, 801, 65, 868, 305, 910, 928
 
▶페리로 황푸강 건너기
황푸강을 건너는 페리는 기존에는 유람선 승선하는 곳 한곳에 설치돼있었으나 새단장과 함께 선착장을 한 곳 추가 설치해 운행 중이다.
•위치: 金陵东路 맞은편(신축), 东门路(기존)
•가격: 2元
•배선간격: 약 15분
 
▶유람선 타기
와이탄 새단장과 함께 가장 많이 달라진 곳이다. 승선 선착장이 12개로 나란히 놓여있으며, 지상 1층 지하 3층 건물로 대기실, 쇼핑상가, 식당, 주차장까지 갖추고 있다. 기존과 마찬가지로 와이탄 남쪽(东门路)에 위치한다. 4월말부터 정식 운행되며 이전까지는 기존 선착장을 이용하면 된다.
•위치: 东门路
 
▶와이탄 관광터널열차 타기
황푸강 밑으로 푸동과 푸시를 달리는 관광열차 타는 곳도 편리해졌다. 지하도를 통해서 건너거나 계단을 이용해야 했으나, 전용 에스컬레이터가 생겼다. 위치, 가격은 기존과 같다.
•가격: 55元(왕복) 45元(편도)
         동방명주+관광터널=140元
         진마오다샤전망대+관광터널=115元
         과기관+관광터널=100元
•운행시간: 08~22:00(휴일 30분 연장)

 


▶와이탄 지하주차장 위치
와이탄 지하주차장을 확보해 500대 가량 주차가 가능하다. 4월말부터 운영이 시작된다.
•입구: 九江路와 汉口路 사이
延安东路와 新开河路사이

▶주변 주차장 안내
상하이시에서는 와이탄의 원활한 주차를 위해 지하추장으로 수용이 충분치 않은 차량을 위해 주변 주차시설을 안내하고 있다. 시간당 10위엔이며 30분마다 5위엔 추가.
와이탄 인근 주차장

 
1.海湾大厦: 黄浦路53号(近天潼路金山路)
 
2.上海滩国际大厦: 黄浦路99号(近武昌路)
3.外滩茂悦大酒店: 黄浦路199号(近南浔路)
4.久事大厦: 中山南路28号(近外咸瓜街东门路)
5.威斯汀大酒店: 河南中路88号(近广东路福州路)
6.金外滩宾馆: 广东路525号(近湖北路福建中路)
7.中福停车库: 西藏中路168号(近汕头路)
8.汇金大厦: 汉口路515号(近福建中路)
9.八达停车场: 九江路518号(近福建中路)
10.王宝和大酒店: 九江路555号(近福建中路)
11.旺角广场停车场: 山东南路8号(近宁海东路盛泽路)
12.中福大厦: 九江路619号(近汉口路浙江中路)
13.华盛大厦: 九江路399号(近汉口路山西南路)
14.东新大厦: 浙江南路78号(近永寿路宁海东路)
15.置地广场: 南京东路409-459号(近山西南路)
16.金融广场: 九江路333号(近山西南路)
17.众市停车场: 天津路(近福建中路)

2010년 9월 19일 일요일

농림수산물 등의 면세통관범위

농림수산물 및 한약재 등의 면세통관범위는 다음 기준에 따르되 총량 50kg 이나, 전체해외취득가격 10만원 이내로 함. 단, 면세통관범위내라 하더라도 식물방역법 및 가축전염병예방법에 의한 검역대상물품은 검역에 합격된 경우에 한하여 면세통관됨.

참기름 5kg, 참깨 5kg, 꿀 5kg, 고사리 5kg, 더덕 5kg, 잣 1kg, 기타 품목당 5kg, 인삼(수삼, 백삼, 홍삼 등 포함) 300g,녹용 150g, 기타 한약재 품목당 3kg, 모시와 삼베는 면세통관을 불허하고 각 3필(규격: 50cm ×16m)까지 과세통관만을 허용.

100가지 표정이 있는 나라 ‘홍콩’

 
홍콩은 최상급의 수식어로 다양하게 표현되는 매우 경이로운 도시이다. 세계 최대의 은행 센터가 들어서 있는 도시 중의 하나이며, 자유 무역항으로서 세계무역의 무대에서 당당히 선두에 있는 곳이다. 또한 세계에서 세 번째 가는 영화산업의 본거지이며, 두개의 세계 최장 옥외 에스컬레이터, 세계 최대 규모의 중국식 레스토랑이 있는 곳이다. 이 곳의 맥도날드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곳이라 할 수 있고, 세계 최대의 경마 배팅 액수를 기록하고 있기도 한 홍콩은 세계 최대 청동 좌불상도 보유하고 있다.

홍콩은 세계에서 가장 편리하게 보고 즐길 수 있는 관광지 중의 하나이다. 좁은 면적을 이용해서 모든 것이 효율적으로 집약화되어 있기 때문에 최상의 교통시스템과 완벽한 영업서비스로 단기 체류나 장기체류하는 방문객에게 그들이 원하는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제공할 것이다. 최상의 가치를 선사하는 홍콩에서의 시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 것이다.

백만불짜리 야경 ‘빅토리아 피크’

 
빅토리아 피크에서 본 홍콩의 야경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스카이 라인을 이루고 있다. 두 개의 지역이 바다로 나뉘어져 있고, 그 사이를 유유히 떠다니는 유람선과 정크선들, 이곳에서 홍콩의 야경을 바라보며 일상에서의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수 있다.

빅토리아 피크를 가기 위해서는 우선 피크트램을 이용하는 것이 있다. 피크트램 정거장까지는 센트럴 시청 앞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보다 멋진 관광을 하기 원한다면 꼭 2층에 자리를 잡는 것이 좋다.

빅토리아 피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피크타워’이다. 이곳엔 전망대를 비롯하여 기념품 상점과 고급 레스토랑까지 갖춰져 있어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편의를 제공해 준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홍콩의 아름다운 전망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빅토리아 피크 주변의 건물과 경치를 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스탠리(Stanley)

 
침사추이나, 센트럴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 바로 스탠리이다. 홍콩 중심부의 번잡함을 피해 서양사람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하면서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관광객들이 제법 많이 늘어서 예상만큼 한적한 맛은 찾아보기 힘들겠지만, 스탠리만의 충분한 매력이 있으므로 꼭 한번 들러볼만 하다. 스탠리 마켓에 가려면 보통 센트럴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데, 꼬불꼬불한 길을 약 30-40여분 달리면 도착할 수 있다.

버스 터미널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는 스탠리 마켓에는 흥미로운 물건들이 많다. 꼭 물건을 구매하지 않아도 그 거리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쇼핑을 즐긴 후에는 스탠리 베이로 가보자. 수영을 하라고 권할 만큼 물이 깨끗하진 않지만, 바닷바람을 쐬며 여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다.

리펄스베이(Repulse Bay)

 
도심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리펄스 베이는 부유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호화 맨션과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곳으로, 조성모 뮤직비디오의 배경으로 등장했던 곳으로 우리에게 낯설지 않으며, 반짝이는 모래사장을 특징으로 한다.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홍콩인들에게까지 인기있는 명소인 이곳의 모래는 호주 등지에서 꾸준히 수입해서 들여 온 결과라고 한다. 물장구를 치는 사람들 보다 해변에 누워서 일광욕을 즐긴다거나 해변을 거닐며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 보다 더 여유롭게 한가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해변을 따라 동쪽으로 약 20여분을 걸어가면 알록달록한 색의 커다란 관음상과 천후상이 있는 틴하우 사원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이곳에 있는 인연석을 만지면 짝이 없는 사람들은 인연을 만난다고 하니, 올 겨울을 따뜻하게 같이 보낼 짝을 찾고 있다면 꼭 들러보자!

▶하나투어 상해지사
홍콩+1박 자유여행 4일
-할인 호텔, 해외여행, 국내여행, 항공권, 데이투어, 기타 여행서비스
•10월 1일 홍차오 출발 어른 4490위엔/어린이 3990위엔
•예약 문의: 021)5108-9090
•www.hanatour.cn(상해 및 북경출발), www.hanatour.com(한국출발)

▶세진관광
홍콩 3박4일 에어텔(5성급호텔)
•10월 1~5일 4150위엔/평일 2790위엔
•예약문의: 021)6270-3991
•www.sejintour365.com

▶상해직공여행사
-홍콩 3박4일 관광
•10월 3일 출발 4599위엔
•예약문의: 021)3126-0900  
•www.phoenixtour.net

아이들의 '몰입' 원한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라

몰입은 동기부여와 목표의식에서 나온다



“나는 아이들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특히 규칙을 깨고 지침을 따르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그들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뭐든 잘할 아이들이다.” (마이클 델)


“삶에서 당신의 사명을 찾는 것은 당신 마음이 깊은 희열을 느끼는 것과 세상이 깊은 허기를 느끼는 것 사이의 교차점을 찾는 일이다.”(프레드릭 비크너)



학벌에 대한 환상이 강한 한국이다 보니 하버드대 학생이라면 비범한 천재들이나 별종들만 다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필자가 부탁받은 이 원고 주제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하버드대 학생이라고 해서 대단한 천재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몰입의 달인들’만 모여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하버드대 학생들 가운데 체계적으로 잘 몰입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유학 전 국내 한 대학원에도 적을 뒀던 필자의 경험으로는 두 학교 학생들의 평균적인 몰입도가 다름은 분명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몰입의 원재료는 흥미와 열정, 그리고 의미와 소명


그럼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몰입의 뜻을 칙센트미하이 교수의 표현으로 유명해진 flow가 아닌 한자 沒入이나 영어 표현 immersion으로 생각해 본다면 몰입이란 뭔가에 깊이 빠져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상태에서 일에 빠져드는가. 그 일을 좋아해야 한다. 워렌 버핏이 “나는 탭댄스를 추면서 출근했다. 그건 엄청난 즐거움이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떤 일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흥미와 열정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그 흥미와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 일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을 때, 자신이 진심으로 느끼는 소명과 맞닿아 있을 때 흥미와 열정은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


필자가 하버드대와 국내 대학에서 공부할 때 느꼈던 학생들의 몰입도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이 세상에 온 의미가 무엇인지, 내가 평생에 걸쳐서 추구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천양지차다.


케네디스쿨에서 수학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차이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 가운데 평균적으로 한국 학생들은 매우 똑똑한 편이다. 수업 준비도 잘하고 개인별로 편차는 있지만 대체로 성적도 좋은 편이다. 이것은 국내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한국 학생들에게는 열정이 부족하다. 자신이 뭘 하고 싶어 하는지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미국 학생들을 비롯해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은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바가 뚜렷했다. 저개발국가의 경제 발전을 돕겠다는 슌스케, 에이즈 퇴치를 위해 일하겠다는 크리스틴, 신재생에너지 개발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미셀, 3차원 홀로그램 영상 개발에 푹 빠져 있는 크리스, 아시아계 소수인종의 권익 향상을 위해 일하겠다는 피나, 동북아 평화와 협력 증진을 위해 일하겠다는 재미교포 피터 등 꿈은 각양각색이지만 대체로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바는 뚜렷한 학생들이 많았다.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국내 학생들


반면 국내 대학원에서 경험했던 한국 학생들은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바를 명확히 결정하지 못하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보다는 남들이 볼 때 ‘괜찮은 직장’을 목표로 삼는 학생들이 많아 보였다. 획일적 기준이 작용하다 보니 대학이나 대학원 과정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지적 열정을 불사르기보다는 ‘스펙 쌓기’에 몰입(?)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물론 이 글에서 길게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부동산 거품 등으로 양질의 일자리를 생산하지 못하는 한국경제의 구조적 상황도 매우 크게 작용하지만 말이다.


이처럼 하버드대 학생들은 훨씬 더 분명하게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기에 훨씬 더 강한 열정과 에너지를 분출한다. 또한 자신의 의미와 소명을 찾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다고 단순히 공부만 파고드는 것도 아니다. 학생들은 매우 다양한 과외 활동이나 이벤트나 학술행사, 모임 등에 참여한다. 국내처럼 책만 파고 수업만 열심히 들어 학점 잘 받는 유의 ‘범생이’ 스타일은 오히려 매우 드물다.


예를 들어 사회학 박사과정에 진학하려는 캐서린은 관련된 수업도 열심히 찾아 듣지만 저소득층 거주지의 중학교에 나가 수업 자원봉사를 하고, 관련된 학생저널의 편집진으로도 활동하는 식이다. 여름에는 관련 비영리단체나 연구기관, 국제기구 등에서 인턴을 하기도 한다. 그에게 이들 활동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과정이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맞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과정이다. 또한 서로 다른 활동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가진 목표를 향해 유기적으로 연결된 활동들이다. 그렇기에 캐서린은 자연스레 그 모든 활동들에 몰입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6대륙 최고봉 오르기’ 프로젝트의 경우


또 다른 예를 들자면,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학생들과 비즈니스 스쿨 학생들이 연합해 ‘6대륙 최고봉 오르기’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언뜻 보면 좀 스케일이 큰 등반 모임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전혀 다르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학생들 네트워크를 활용해 세계 각국에서 소아암 퇴치를 위한 기금 마련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기금을 모금하고, 홍보하고, 마케팅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사람들을 조직화해나가는 방식을 배우게 된다. 물론 같은 뜻으로 뭉친 학생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네트워크도 쌓게 된다. 뚜렷한 목표 의식 아래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현실화하는 방법을 실천적으로 배우게 되는 모임이다. 당연히 학생들의 참여도와 몰입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같은 학생들의 몰입이 천부적인 능력을 가진 학생들만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 하버드대를 비롯해 미국 유수의 대학과 대학원들은 신입생들을 뽑을 때부터 각종 수학능력점수 및 추천사와 함께 학생 개개인의 지원 동기와 수학 의욕을 파악하기 위해 에세이를 쓰게 한다. 이 에세이에서 자신이 왜 해당 대학에 가야하는지, 그 학교에서 뭘 배우고 싶은지, 그것이 자신의 향후 목표를 이루는데 왜 필요한 과정인지, 자신이 이전에 살아온 과정에서 왜 그 같은 주장이 진실성이 있는지 등을 입증하지 못하면 아무리 시험 성적이 우수해도 하버드대 입학 허가는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몰입의 원재료인 동기부여와 목표의식, 열정을 이미 입학 심사 때부터 강조하는 것이다.


직원들 다그치기보다 몰입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시스템 만들어야


입학 당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은 입학하고 나서도 뛰어난 교수들로부터 폭넓고 심도 있는 지적 자극을 받게 된다. 또 각 대학과 대학원은 학생들이 다양하게 경험하고 관심과 열정을 유발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각종 세미나, 포럼, 모임, 프로젝트, 행사 등을 수도 없이 진행한다. 각종 학생 활동도 전폭적으로 지원한다. 필자가 수학했던 케네디스쿨의 예를 들면, 하루에만 최소 수십 개의 각종 학술 모임과 행사 등이 열렸다. 또 학교측은 ‘코커스’라고 불리는 수백 개의 각종 동아리와 수십 종의 학생저널 발간을 지원했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도 학생들이 각종 학문적, 현실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턱없이 부족한 국내 대학과는 다른 모습이다.


국내에서는 기업을 비롯해 어떤 조직이든 직원들의 자발적인 몰입을 이끌어내기보다는 몰입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몰입은 개별 조직 구성원의 열정과 목표의식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조직원들의 열정과 소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분위기와 시스템이 뒷받침될 때 더욱 활성화된다. 조직의 리더들은 ‘왜 몰입하지 않느냐’고 다그치기보다 구성원들의 몰입을 이끌어내기 위해 동기를 부여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선대인 트위터 http://twitter.com/kennedian3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

2010년 8월 23일 월요일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녹취록

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
일 시: 2010년 6월 17일 (목) 오전 7시 30분
장 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521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2층 국화룸

저는 지난 6월 10일 오후 5시 1분에 컴퓨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로호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도 크셨겠지만 저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런데 대략 6시쯤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7시에 거의 그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저는 성공을 너무너무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 날 연구실을 나오면서 이러한 생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그날 서운하고 속상했던 것은 나로호의 실패에도 있었지만 행여라도 나로호를 만들었던 과학자, 기술자들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분들이 의기소침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 그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더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어떻게 이것을 학생들에게 말해 주고 그분들에게 전해 줄까 하다가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런 글을 하나 봤습니다.

1600년대에 프랑스에 라 포슈푸코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촛 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 그러나 큰 불은 바람이 불면 활활 타오른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의지가 강열하다면 또 우리 연구자, 과학자들의 의지가 강열하다면 나로호의 실패가 더 큰 불이 되어서 그 바람이 더 큰 불을 만나서 활활 타오르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 그런데 이 나로호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것도 바로 우리의 역사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가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고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을 국민이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1957 년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라고 하는 인공위성을 발사했습니다. 그 충격은 대단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학생인 저도 충격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국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뱅가드호를 발사했는데 뱅가드호는 지상 2m에서 폭발했습니다. 이것을 실패하고 미국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왜 소련은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했는가, 그 연구보고서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이 나 있습니다.
‘우리나라(미국)가 중학교, 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꿔야 한다.’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런데 사실은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도 독일 과학자들의 힘이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미국이 뱅가드호를 실패하고 그 다음에 머큐리, 재미니, 여러분들이 아시는 아폴로계획에 의해서 우주사업이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미국의 힘이 아니라 폰 브라운이라고 하는 독일 미사일기술자를 데려다가 개발했다는 것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 중국은 어떻게 되냐면 여기는 과학자들이니까 전학삼(錢學森)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 텐데요, 전학삼은 상해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에 공과대학에서 29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수를, 2차대전 때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의 미사일팀장을, 그리고 독일의 미사일기지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핵심기술자입니다.

그런데 이 전학삼이라는 인물이1950년에 미사일에 관한 기밀문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귀국하려다가 이민국에 적발되었습니다. 그래서 간첩혐의로 구금이 되었고 그때 미국에서는 ‘미국에 귀화해라. 미국에 귀화하면 너는 여기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고 전학삼은 그것을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미국 정부에 전학삼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때 중국 정부는 미국인 스파이를 하나 구속하고 있었고, 이 둘을 1 대 1로 교환하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미국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전학삼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우리는 너와 우리의 스파이를 교환하지만 네가 미국에 귀화한다면 너는 여기 있을 수 있다.’ 그랬더니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전학삼에게 ‘너는 중국에 가더라도 책 한 권, 노트 한 권, 메모지 한 장도 가져갈 수 없다, 맨몸으로만 가라.’
그래도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습니다.

나이 마흔여섯에 중국에 가서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일화입니다.
모택동이 ‘우리도 인공위성을 쏘고 싶다, 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전학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가 그것을 해낼 수 있다. 그런데 5년은 기초과학만 가르칠 것이다. 그 다음 5년은 응용과학만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 5년은 실제 기계제작에 들어가면 15년 후에 발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동안의 성과가 어떠하냐 등의 말을 절대 15년 이내에는 하지 마라. 그리고 인재들과 돈만 다오. 15년 동안 나에게 어떠한 성과에 관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면 15년 후에는 발사할 수 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택동이 그것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재와 돈을 대주고 15년 동안은 전학삼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나이 61세, 1970년 4월에 중국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이 모든 발사제작의 책임자가 전학삼이라는 것을 공식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 렇게 보면 오늘날 중국의 우주과학 이러한 것도 전부 전학삼에서 나왔는데 그것도 결국은 미국의 기술입니다. 미국은 독일의 기술이고 소련도 독일의 기술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선진국도 다 그랬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 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 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 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 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 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 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 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 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 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 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 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 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 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 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 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 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 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 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 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체의 체적이 6만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sinA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도 42분 51초, 다시 말씀 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 소수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니까?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線上에 있다. 甲地는 北極出地, 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 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도 30분에 있다. 甲地에서 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鼓?)가 12번 울리고 종료(鍾鬧)가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鼓? )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기 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 리는 백리 2백리 하는 里자, 里數를 기록하는, 고는 북 鼓자, 북을 매단 수레 車, 수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 러분 불국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科. 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 갈고리 勾자, 허벅다리 股자입니다. 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습니다. 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 여기에 구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 24문제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 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비밀할 때 密, 비율 할 때 率.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순지의 칠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 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負)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없는 것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들이 명백하게 다큐멘트, 문건으로 남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정리되면 세계사에 한국의 역사가 많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인 세계사를 풍성하게 한다는, 세계사에 대한 기여입니다.

◈ 맺는 말

○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 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자료는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억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한문 전공한 사람 보셨습니까?
정말 엔지니어가 중요하고 나로호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문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동경대학으로 가고 북경대학으로 가는 상황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되냐 하면 공대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물리학사, 건축학사가 나옵니다. 수학과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허벅다리, 갈고리를 아! 딱 보니까 이거는 삼각함수구나 이렇게 압니다. 밤낮 논어·맹자만 한 사람들이 한문을 해서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시면 ‘이 시대에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여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감사합니다.

2010년 8월 13일 금요일

불꽃놀이식 마케팅

"그들은 질적 성장 대신 원가 절감에 주력했다. 브랜드 이미지가 악화됐는데도
장기적인 브랜드 구축보다는 단기적인 월간 프로모션에 집중해 단기 판매 증대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다. 내가 맡고 있는 글로벌 팀의 한 팀원은 이것을
'불꽃놀이'식 마케팅 방법이라고 말했다.
화려하게 한 번 폭발한 뒤 한순삭에 사라지고 마는 일회적이고 소모적인
마케팅 활동을 비판한 것이다."

-래리 라이트/조안 키든, <2달러의 기적>, pp.25


지금 현실에 너무 딱 맞는 내용이다
.
혼자만 보기엔 안타깝다.

2010년 8월 4일 수요일

잡초는 없다

http://www.imbc.com/broad/tv/culture/spdocu/localdocu/1573242_5975.html

지금은 더 없이 맛있는 먹거리가 된 콩도 한때는 잡초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글자 그대로 ‘잡초’인가? 아니면 보물인가?”에 대한 답은 우리가 진정 그 가치를 발
견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어쩌면 잡초는 철저하게 ''害草''라고 믿었던 지금까
지의 생각은 잘못된 편견과 오해로 인한 왜곡된 진실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그
런 오해를 풀기위한 심도 있는 도전을 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알려진 식물 약35만여 종 중 인간이 재배해 먹고 있는 것은 고작 3천여 종
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대부분의 식물을 “잡초”라 부르며 뽑고, 베고, 약을
치고, 태우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제거에 온 힘을 쏟아온 셈이
다. 이제 더 이상은 그와 같은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잡초란 쓸모없고 귀찮은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아직은 그 가치가 발견되지 않은 식물’이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잡초와 인간이 오랜 싸움을 끝내고 相生할 수 있는, 또 잡초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2010년 8월 2일 월요일

비전을 공유하라

"만약 배를 만들고 싶다면 남자들을 불러 모아 목재를 마련하고
임무를 부여하고 일을 분배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무한히 넓은 바다에 대한 동경을
보여줘라."

-생떽쥐페리의 말, <혜낭록>,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p.134


2010년 7월 29일 목요일

울진

 




겨울바다는 그리움이다. 두 손으로 시린 귀를 감싸고, 겨울바다를 서성대다 보면 세상 시름이 잠시 잊혀진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끼룩끼룩’ 우는 갈매기 떼는 시인이 되게 하고, 쟁여둔 가슴속 상처를 꺼내게 한다. 가슴이 아림을 느낀다. 거친 숨을 뱉어내듯 끝없이 출렁이는 파도에 홀린 가슴에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솟구친다. “마음이 아무리 맑다 해도/겨울바다에 비하랴/파도로 닦고 닦아 주름살을 지우고/늙지 않는 영원의 거울에 비친/슬픔도 익어 아름답고/즐거움도 넘쳐 넉넉한 것이/안으로 뜨겁게 타올라/꺼지지 않는 불길 품고 사는/우리의 꿈이 아무리 푸르다 해도/겨울바다에 비할 수 있으랴”- 최호림의 시 ‘겨울바다’ 중에서

백두대간의 태백준령 동쪽의 동해를 마주한 울진은 겨울바다의 낭만과 운치를 한껏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울진의 해변 길이는 82km나 되고, 파란 물결과 빼어난 산줄기와 나란히 달리는 7번 국도는 바다와 멀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하지만 경상북도 동북단에 위치한 울진은 지형의 크기나 산의 높이에 비해 골짜기가 맵고 짜기로 소문난 지역으로 아직도 ‘심산유곡(深山幽谷)’이 곳곳에 남아 있는 오지다. 옛말대로 ‘등허리 긁어서 안 닿는 곳’ 울진을 찾아가는 길은 크게 두 갈래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만종IC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서안동 나들목에서 내려서 안동을 지나 34번 국도를 타고 불영계곡 쪽으로 가는 길과 영동고속도로로 강릉까지 가서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동해IC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동해안을 따라가는 길이 그것이다. 두 길의 느낌은 해변의 풍광과 계곡의 비경으로 서로 판이하다. 그래도 차갑지만 낭만과 운치가 있는 동해안 풍경이 더 마음을 끌어당겼다.

강원도의 동해시와 삼척을 지나자마자 맨 처음 만나는 울진 땅이 ‘고포미역’으로 유명한 고포마을이다. 지난 1968년 울진·삼척 지역으로 침투했던 무장공비들이 상륙 포인트로 삼았을 정도로 호젓한 이 바닷가 마을은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강원도와 경상북도로 나뉘는, 분단의 마을이다. 음력 정월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햇미역을 채취하기 때문인지 마당만 한 포구는 콧등까지 찡하게 만드는 칼바람만이 옷깃을 스칠 뿐 사람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템포 빠른 삶에서 녹슬고 메말라버린 감성을 촉촉이 적셔주기에는 충분했다.




햇빛이 바다 속 깊은 곳까지 들이칠 정도로 바다 빛이 맑다는 고포마을을 나와 7번 국도를 타고 내달리다 보면 멀리 죽변 등대가 보이고 그 아래 죽변항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백 척의 어선들이 분주히 오가는, 낚싯고리처럼 둥글게 도열한 선착장과 바다 먹을거리를 옹골차게 쏟아내는 포구의 정경은 어머님 품같이 편안하다. 이른 아침, 배들이 그물을 걷어 들이고 돌아올 무렵이면 하루 중 어판장이 가장 신명 날 때다. 수협 경매인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모든 게 바쁘게 움직인다. 가장 인기 높은 것은 역시 대게 경매로 4, 5월까지 속살이 쫄깃쫄깃하고 담백한 울진 대게를 맛볼 수 있다.

영덕 강구항과 함께 대게로 유명한 죽변항은 드라마 한편으로 운치를 더했다. 1910년에 세워졌다는 죽변 등대의 북쪽 바닷가 언덕 위에는 드라마 ‘폭풍속으로’ 세트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언덕 위에 세워진 아담한 교회와 아주 오래된 듯한 일본식 집, 대나무(산죽) 숲 한가운데 운치 있게 서 있는 등대와 봉우깨 해변이 이국적인 풍광을 연출한다. 사진 촬영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눈뿐 아니라 귀도 즐겁다. 대나무끼리 줄기와 잎을 비비며 쏟아내는 소리와 절벽에 부딪쳐 아우성치는 파도소리의 하모니도 묘한 울림을 전한다.

죽변항을 빠져 나와 7번 국도에서는 차창 밖으로 줄곧 집어삼킬 듯 거칠게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토해내는 쪽빛 바다가 펼쳐지고, 푸른색이 지겨울 즈음이면 야트막한 소나무 산들이 오밀조밀 고개를 내민다. 울진읍을 벗어나 조금만 내려가면 수산교 사거리에 이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풍광이 수려한 불영계곡을 따라가는 36번 국도이고, 왼쪽으로 들어서면 시종 그림 같은 해안을 끼고 달리는 917번 지방도로다. 차창을 열고 파도소리가 들리는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관동팔경 중 하나인 망양정(望洋亭)과 해맞이공원, 망양정해수욕장과 촛대바위 등이 줄지어 나타난다. 망양정해수욕장 외에 딱히 해수욕장이라 명명된 곳은 없어도 물 맑고 모래 고운 해변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고, 갯바위 낚시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여럿 있다. 길가에는 금방 잡아 덕장에 내건 허연 피데기(반건조 오징어)들이 너풀거린다. 마음 끌리는 곳이 있으면 잠시 차를 멈추고 겨울 풍경을 즐기면 된다. 이따금 한적한 해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갈매기들이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새우깡을 모래사장 위에 놓자마자 갈매기 떼가 금세 날아와 먹는다. 여름의 화려한 흔적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지만 한적한 해변을 걷는 즐거움은 어느 계절에도 느낄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다.

바닷가 솔숲 언덕에 자리 잡은 망양정에서는 푸른 동해 바다를 장쾌하게 조망할 수 있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정자인 망양정에 오르면 왕피천 너머 스쳐 지나온 울진의 포구들이 내려다보인다. 일찍이 관동팔경의 그림을 본 조선 숙종은 팔경 중 망양정이 가장 낫다고 하여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글씨를 써보내 정자에 걸도록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망양정은 본래 자리에 있지도 않은 데다 건물도 근래 지어진 것이어서 예스러운 멋이 없다.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느낄 수 있게 하는 해안드라이브 코스는 덕신교차로에서 다시 7번 국도와 만난다. 여기서 옛 시인묵객들이 감탄으로 다녀갔던 옛 망양정 터에 자리한 망양휴게소와 기성망양해수욕장, 해월원을 지나면 울진 땅의 또 다른 관동팔경인 월송정(月松亭)에 도달한다. 신라 때의 네 화랑이 울창한 솔밭에서 달을 즐기며 노닐던 정자인 월송정은 정자 자체보다도 주변 솔숲이 더 인상적이다.

월송정 솔밭을 뒤로하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울진의 남단에 위치한 후포항이다. 이른 아침에 항구에 들르면 고깃배에서 각종 어패류가 부려지는 어시장 풍경을 구경하면서 동해에서 갓 잡아 올린 횟감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후포항은 풋사랑에 들이켜는 소주처럼 울컥거림이 있어 그 어느 항보다 살갑다.
예부터 ‘진귀한 보배가 많은 곳’이라 해서 이름 붙여진 울진,‘ 아∼ 아름답다’는 탄성과 함께 세상 시름이 잠시 잊힌다.

“속세의 웃음맛과/속세의 울음맛을/영영 끊어버린/겨울나무들//산사로 올라가며/염불 외는 소린 듯/바람이 분다//뉘우친 파계승(破戒僧)/뒤처져 걷는 길에/때묻은 발자욱을/따라가며 지워주는//눈발이 흩날린다/풍경소리 들린다/향 내음도 자욱하다”- 유안진의 시 ‘겨울 산길’

겨울 산사, 때맞춰 하얀 눈까지 내린다면 무엇을 더 바랄까. 빛바랜 기와와 나직한 담장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한겨울의 산사, 눈 덮인 팔작지붕의 우아한 곡선 등을 연상했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무한한 하늘 아래로 햇살 또한 끝없이 내리쬐고 겨울답지 않은 바람결에 몸과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7번 국도로 빠진 뒤 동해·삼척·울진읍을 지나 봉화 방향 36번 국도로 들어서자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물이 맑고 숲이 울창한 불영계곡에 다가들었다. 설악산 천불동계곡, 지리산 칠선계곡 등과 함께 남한의 3대 계곡 중 하나로 꼽히는 불영계곡은 통고산~진조산~백병산에 이르는 낙동정맥의 명산들에서 발원해 동해로 흐르는 길이 약 40km의 소하천 불영천을 이른다.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길은 골짜기로 파고들수록 이리저리 강퍅하게 휜다. 길 아래로는 내려다보기 두려울 만큼 아찔한 70~80m에 이르는 절벽들이 줄지어 있고, 흰색 화강암 절벽 위에 소나무가 뿌리를 박고 늠름하게 서 있다. 구절양장의 심한 굽돌이가 무수히 반복되고, 짙은 옥색의 소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눈이 즐겁고 가슴이 확 트인다.
하지만 국도에서는 불영계곡의 참모습을 만날 수 없다. 차창 밖으로 가끔 일부 빼어난 경치만 보일 뿐이다. 넓고 깊은 불영계곡은 발품을 팔아 제대로 걸어봐야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별명이 왜 붙었는지, ‘대동여지도’에서 비단 금 자를 써서 ‘금계천(錦溪川)’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불영사계곡 휴게소부터 서면 하원리의 불영사까지의 경치가 수려하다.

불영계곡은 ‘불영사’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신라 진덕여왕 5년(651)에 의상대사에 의해 세워진 불영사의 본래 이름은 ‘구룡사’였는데, 부처 형상을 한 뒷산 바위가 절 마당 연못에 비쳐 ‘불영사(佛影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국도변 주차장의 일주문에서 불영사 대웅전 앞마당까지 약 500m의 진입로가 특히 인상적이다. 일주문에 들어설 때면, 거창하게 해탈까지는 이르지 못해도 쓸데없는 아집은 미련 없이 실어 보낼 수 있다. 구룡교를 건너면서부터 나타나는 고목 숲길은 불영사의 텃밭까지 이어진다.

천축산 깊숙한 곳에 자리한 불영사는 비구니의 참선 도량이라 정갈하다는 느낌이 가득하다. 고즈넉하면서도 정갈해서 찾는 이의 마음조차 차분하게 한다. 처마에 매달린 메줏덩이와 잘 마른 무청시래기를 보면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시래기 된장국의 구수한 맛이 그리워지며 마음이 넉넉해진다. 조심스런 걸음걸이로 경내를 오가는 비구니 스님의 온화한 미소는 산사 여행의 의미를 찾으려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부처님 그림자가 비치는 연못을 지나면 팔작다포집으로 18세기경의 건물로 추정되는 대웅보전(보물 제1201호)에 시선이 꽂힌다. 대웅보전 내에는 석가모니 부처가 인도의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화려한 색채와 세밀한 묘사로 표현한 영산회상도(보물 제1272호)와 불영사의 600년 된 은행나무의 일부로 2002년에 봉안한 삼존불이 있다. 대웅보전은 특이하게도 돌거북 조각 한 쌍이 기단을 받치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불영사가 있는 자리가 화산(火山)이어서 그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서라고 한다. 머리와 몸통 일부를 드러낸 채 대웅전을 업고 있는 돌거북의 모습이 독특하지만 너무 힘들어 보인다. 대웅보전의 지붕 끝에 풍경이 걸려 있고 물고기 한 마리가 하늘을 유영한다. 바람결에 퍼지는 풍경소리가 온 산에 퍼진다.

경내 여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다포계 홑처마 맛배집으로 조선 중기 초엽의 건물로 추정되는데, 그 역사성과 건축미 덕분에 보물 제73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96년 신축한 천축선원은 일년 내내 운수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전국 비구니 선원 중 규모가 큰 대표적인 선원이다.
절 마당 한 쪽 언덕으로 금강소나무가 무리로 펼쳐져 있다. 하늘을 뚫을 듯한 기세로 서 있는 금강소나무는 겨울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는다.

매표소에서 받은 팸플릿에 ‘마음 닦기 좋은 곳, 佛影寺’라고 쓰여 있듯이 산사의 평온함과 설명할 수 없는 여유로움, 천년 고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전국 각지에 제각각의 특색을 지닌 온천들이 있지만, 울진은 백암온천과 덕구온천으로 유명하다. 특히 덕구온천은 단순히 수질 좋은 온천에 몸을 담그던 수준을 넘어 스파와 몰놀이를 즐길 수 있는 휴양 온천으로 찾는 이가 많다.

동해를 굽어보는 응봉산(999m) 자락의 덕구온천은 국내에서는 드물게 계곡에서 저절로 솟는 자연용출수를 데우지 않고 그대로 온천수로 사용한다. 응봉산 500m 지점에 있는 암반에서 뿜어 나오는 41.8℃의 온천물은 원통관을 타고 온천장으로 내려온다. 하루에 뿜어지는 양은 4000t에 달하지만 실제 필요한 양은 이보다 못해 온천물을 계곡에 흘려보내고 있다고 한다. 땅속에서 마그마가 충분히 익힌 물이 차고 넘쳐 저절로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수질이 좋을 수밖에 없다. 칼륨, 칼슘, 중탄산나트륨 등 유익한 광물질이 함유된 약알칼리성으로 신경통, 류머티즘, 근육통, 피부병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03년 리노베이션을 통해 휴양 온천으로 거듭난 덕구온천의 스파월드는 1000명 이상이 한꺼번에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널찍한 실내 대온천탕과 야외온천탕을 갖추고 있다. 현대식 기포욕, 바디 마사지 등을 갖춘 테라쿠아는 수(水)치료 전용 풀이라면 미끄럼틀 등이 있는 스파액션은 물놀이가 가능한 공간이다.

실내에서 몸을 따뜻하게 데운 뒤 노천에서 즐기는 온천욕은 겨울에 더욱 빛을 발한다. 편백나무 정자의 히노키탕이나 재스민과 레몬 향이 피어나는 작고 아담한 탕에 몸을 담그면 머릿속까지 맑아진다. 눈이라도 내리면 코끝을 스치는 겨울바람의 상쾌함과 온천욕의 운치는 절정에 달한다.

덕구온천의 또 다른 즐거움은 매일 오전 7시에 가이드와 함께 덕구계곡을 따라 원탕까지 오르는 트레킹이다. ‘제2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응봉산의 계곡미는 여타 소문난 계곡에 뒤지지 않는다. 큰 오르막이 없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 산행 길에 세계적인 명물 교량을 흉내 낸 다리 13개를 건너게 되고, 승천한 용이 내려와 선녀들과 가무를 즐겼다는 선녀탕과 이무기가 응봉산 여신의 도움으로 용으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든 용소폭포, 응봉여신을 모신 산신각, 그리고 온천의 원탕을 둘러본다. 왕복 8㎞의 트레킹 코스는 2시간 정도 소요된다.

7번 국도에서 88번 국도를 타고 서쪽으로 10㎞쯤 달리면 지난 1997년 관광특구로 지정된 백암온천이다. 백암온천은 신라 때부터 알려진 유서 깊은 유황온천으로, 만성피부염, 자궁내막염, 부인병, 중풍, 동맥경화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온은 32~53℃로, 콘도와 관광호텔의 대중목욕탕에서 매끄러운 온천수로 여독을 풀 수 있다.




소광리 금강송 군락지
예부터 ‘진귀한 보배가 많은 곳’이라 해서 이름 붙여진 울진에는 해안가나 강가, 산속 어디든 소나무가 울창하다. 하지만 소나무 중 으뜸인 ‘금강송(金剛松)’을 보기란 쉽지 않다. 하늘을 뚫을 듯한 기세로 서 있는 울진 소광리 금강송 숲은 우리나라 최대의 금강송 군락지다. 소나무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금강송은 금강산을 비롯한 태백산맥 일대에서 자란다 해서 붙은 이름으로 적송(赤松), 황장목(黃腸木), 춘양목(春陽木), 미인송(美人松) 등으로도 불린다.

금강송은 궁궐의 대들보나 기둥, 왕실의 관에 쓰이는 최고의 목재로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직접 관리를 했던 나무다. 워낙 깊숙한 곳에 있어 개발과 벌목의 칼끝을 피할 수 있었던 소광리에는 1600여ha에 걸쳐 200∼300년 된 금강송 8만여 그루가 빼곡히 들어차 있고, 500년 생도 다섯 그루나 있다. 1959년 육종림 지정 이후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됐던 곳으로, 남부지방산림청이 지난 2006년 7월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 에코투어’란 이름으로 일반에 개방했다.

금강송 군락지는 불영계곡의 원류인 대광천을 따라간다. 불영사를 지나 36번 국도상의 광천교에서 우회전해 917번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대광천 계곡이 눈을 즐겁게 한다. 차창에 비치는 물은 거울같이 맑고 계곡의 경관도 아름답다. 콘크리트 포장길과 비포장길을 따라 16㎞ 정도 오르면 금강송 군락지다. 소나무 기둥은 중간에 가지를 뻗지 않은 채,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모습이 장쾌하다. 임도와 계곡으로 이어진 금강송 산책로는 모두 3개로, 전체를 둘러보는 데 2시간 정도 걸린다.
울진국유림관리소 054-780-3940∼2


성류굴

울진의 대표적 관광 명소인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은 일명 ‘지하 금강’이라고도 불리는 석회암 동굴로 약 2억5000만 년 전에 생성됐다. 해발 199m의 성류산 내부에 5개의 연못과 12개의 크고 작은 광장, 50여만 개의 종유석ㆍ석순ㆍ석주 등으로 이루어졌다.

1963년 국내 최초로 관광객들에게 개방된 성류굴은 억겁의 신비를 간직한 생성물의 모습이 다른 석회동굴에 비해 아기자기하지만, 인간의 발길이 이어진 시간만큼이나 곳곳이 훼손됐다.
전장 472m인 동굴 내의 못은 외부의 왕피천과 서로 연결돼 있고, 박쥐ㆍ곤충류 등 동물 31종이 서식하고 있다. 굴 내부의 온도는 항상 15∼17℃로 겨울에는 따뜻해서 관람하기에 좋다.

관람시간 오전 8시~오후 6시 관람료 어른 3000원/청소년 2000원/어린이 1500원
울진성류굴관리사무소 054-782-4006

내앞마을
불영계곡에 위치한 내암마을은‘사랑한다 말해줘’라는 드라마의 무대가 된 ‘예쁜 마을’로 젊은 연인들이 한번쯤 들르는 단골 여행 코스이다.
근남면 행곡리의 내앞마을은 대나무 숲과 돌담길, 속리산 정이품송보다 다소 작지만 모양이 흡사한 350년 된 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 409호)가 인상적이다. 특히 처진소나무는 키 14m, 둘레 2m로 첫눈에 유다른 기품이 느껴지는 명목이다.

봉평신라비
지난 1988년 논에서 객토 작업을 하던 중에 발견된 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는 신라가 울진을 포함한 동북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석이다. 524년(법흥왕 11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법흥왕 때의 율령반포와 육부제의 실시, 왕권의 실태 등 신라 사회 전반을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로 꼽힌다.


향암미술관
백암온천 입구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는 향암미술관은 2개 건물에 3개의 전시실과 세미나실을 갖추고 있고, 미술관 마당은 조각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지난 1991년 동양화가 향암(鄕岩) 주수일이 사재를 들여 설립한 향암미술관의 전시실에는 한국화 원로들의 작품과 젊은 한국 화가들의 작품, 수석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료 어른 2000원/청소년 1500원/어린이 1000원 문의 054-787-0001

민물고기 생태체험관
감돌고기, 미호종개, 퉁사리, 묵납자루, 모래무지, 두우쟁이, 피라미, 버들치 등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온갖 민물고기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200여 종 민물고기 표본도 전시되어 있다. 아이들과 함께 한번 둘러볼 만한 곳이다.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관람료 어른 2000원/청소년 1500원/어린이 1000원 문의 054-783-9413∼4


구수곡 자연휴양림
울진 시내에서 15㎞ 정도 들어간 응봉산 자락의 구수곡 자연휴양림은 황토로 마감질한 깨끗한 통나무집과 야영장, 야생화관찰원, 숲속 수련장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어 가족 단위로 휴식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아홉 물줄기가 아홉 가지 경치를 보인다’는 뜻의 구수곡(九水谷)은 오염되지 않은 18개의 늪과 10개의 크고 작은 폭포가 절경을 이루며, 수령 50~200년의 금강송, 소사나무, 박달나무 등 희귀 수목이 자란다.

구수곡 자영휴양림에서 2㎞만 더 들어가면 국내 유일의 자연용출 온천인 덕구온천이 있다. 문의 054-783-2241


통고산 자연휴양림
불영계곡 상류에 위치한 통고산 자연휴양림은 통고산(1067m) 등산과 자연숲 관찰로 유명하다. 계곡의 바닥과 양쪽 절벽에는 흰빛을 띠는 화강암이 풍화되어 장관을 이루고 계곡물이 굽이쳐 쏟아지면서 곳곳에 대·소폭포가 있다. 휴양림에는 산림문화휴양관, 숲속의 집, 숲속 수련장 등 휴양 시설을 비롯하여 자연관찰로, 목공예전시실, 체력단련시설 등의 부대시설이 있다.
휴양림을 품고 있는 통고산 정상에 오르면 동해의 일출을 볼 수 있는 매력이 있다. 문의 054-782-9007

고포미역
수심이 얕은 암석에서 자연적으로 생산되는 고포미역은 맛이 담백하고 독특해 고려 때부터 왕실에 진상되기도 했다. 고포미역은 얕은 수심에서 햇볕을 흠뻑 받고 자라 품질이 우수하며 건조할 경우 색깔이 검푸르고 잎이 두꺼운 것이 특징이다. 고포마을은 한 마을 2도(道)의 독특한 마을로도 잘 알려져 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강원도 삼척과 경상북도 울진으로 갈린다.

울진 대게
울진 대게는 다른 바닷게와는 달리 속살이 쫄깃쫄깃하고 담백하다. ‘대게’라는 명칭은 큰 게라는 의미가 아니라 대나무처럼 곧고 길다고 해서 붙여졌다. 울진 대게는 유명세를 타고 있는 영덕대게에 비해 값은 저렴하면서 품질은 차이가 없다. 사실 울진 대게의 어획량이 영덕의 두 배 가까이 되고, 조선시대 임금에게 진상으로 올려지던 대게 역시 울진 대게다.

울진 대게는 매년 12월부터 이듬해 4, 5월까지 맛볼 수 있다. 대게는 대표할 만한 고단백 저칼로리 식품. 칼슘과 인, 철분, 라이신 등 필수 아미노산과 단백질이 풍부한 대신 칼로리와 지방은 낮아 다이어트 식품으로 적합하다. 울진의 대표적인 항구인 후포항과 죽변항에는 횟집이 몰려 있어 어딜 가든 대게의 달콤한 맛을 즐길 수 있다.

 

2010년 7월 28일 수요일

드넓은 초원과 고운 모래, 무수한 별들 ‘내몽고(内蒙古)

[여름 한정 최고 여행지를 찾아서] ② 드넓은 초원과 고운 모래, 무수한 별들 ‘내몽고(内蒙古)
[2010-07-26, 18:03:32] 상하이저널  
몽골은 크게 외몽고, 내몽고로 나뉘어 있으며 몽골의 특징은 청정지역과 밤하늘의 무수한 별, 바다보다 넓은 초원,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사막 등 여름 한정 최고의 휴양지다. 중국 북부의 변방성으로, 중국에서 가장 먼저 성을 형성한 민족자치구로, 내몽고자치구는 북쪽으로 몽골, 러시아와 접하고 있다. 내몽고의 성도인 후허하오터시(呼和浩特市)를 여행차 방문하려면 시원한 여름에 가는 것이 좋다. 내몽고에 끝없이 부는 바람, 모래를 싣고 거칠게 온몸에 부딪쳐 오는 그것만큼 자연이 준 커다란 선물이 또 있을까.

내몽고의 하이라이트 대초원투어
 
 내 몽고의 핵심 볼거리인 대초원 투어는 내몽고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몽고에는 시라무런(希拉穆仁), 후이텅시러(辉腾锡勒), 거건타라(格根塔拉)라는 3개의 초원이 있다. 끝없는 대 초원을 무대로 내달리는 야생마, 몽고파오 하나에 의지해 유목생활을 하던 유목민, 떼지어 가는 양떼, 양몰이 개가 짖어대는 소리, 쏟아질 듯 무수히 많은 초원의 별은 감동과 기쁨을 선사한다.

소박한 소수민족 생활 체험
 
광 할한 초원이 내몽고 여행의 핵심이라면, 소수민족의 생활체험은 초원여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내몽고의 민속활동은 매우 풍부하고 다채롭다. 유목민족들처럼 초원에서 말을 타고 초원마을의 몽고빠오(蒙古包)에서 숙박을 하며 저녁식사는 몽고빠오에서 몽고식 식사를 한다. 양갈비 구이와 양고기 샤브샤브를 맛볼 수 있으며, 저녁식사를 마치고 몽고전통 의상을 입고 밖에 나오 쏟아지는 별 아래서 몽고인들과 노래를 부르며 잊을 수 없는 하루를 보낼 수 있다. 푸른초원 위에 만들어진 몽고빠오에서의 숙박은 여행의 신선함을 더해줄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
내몽고의 사막에는 많은 풍경을 볼 수 있다. 소리나는 사막 향사만(响小湾)은 내몽고 사막의 가장 중요한 여행경지로 꼽힌다. 내몽고의 사막에서는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사막 이외에도 사막에서 즐길 수 있는 여러가지 놀이거리가 많다. 낙타를 금빛 찬란한 모래 사막을 둘러볼 수 있으며, 경사진 모래를 타고 내려오는 모래 썰매, 낙하산, 모토 자동차 등 놓치기 아쉬운 특별한 기억이 될 것이다. 이 밖에 사막과 초원에서 놓치지 말고 봐야 할 것으로는 일출과 노을이다. 어둠이 짙게 깔리며 황량한 사막을 짙게 물들이는 사막의 저녁 노을은 환상 그 자체이다.

내몽고 먹거리
내 몽고에서 최고의 요리인 몽골전통의 양고기 요리와 양고기 샤브샤브를 맛볼 수 있으며, 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술 아이락과 양, 소, 말, 염소, 낙타의 젖을 이용해 치즈와 비슷하게 만든 바슬락, 그리고 우유를 딱딱하게 굳힌 아롤을 맛볼 수 있다.

▶직공여행사
▶3박4일 어른 1800위엔, 아동 1500위엔(항공료 별도)
▶예약문의: 021)6465-7821
www.phoenixtour.net

▶세진관광
▶3박4일 어른 4100위엔, 아동 3500위엔(10명 출발시)
▶예약 문의: 021)6270-3996
▶www.sejintour365.com

중국에서 꼭 맛봐야 할 과일들

중국에서 꼭 맛봐야 할 과일들
[2010-07-27, 09:24:32] 상하이저널  
하미과(哈密瓜)
 중국 신장(新疆)의 대부분 지역에서 재배하고 있으며 ‘박과(瓜) 중의 왕’으로 불린다. 청나라때 강희황제가 하미국 왕이 올린 이 과일을 먹어보고 너무나 맛있어 ‘하미과’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하 미과는 껍질에 줄무늬가 가고 럭비공 모양으로 생겼으며 맛이 달콤하고 레몬향 비슷한 냄새가 살짝 풍긴다. 영양이 풍부하며 특히 빈혈에 좋다고 알려졌다. 더위를 가셔주고 갈증을 없애주는 등 기능으로 여름철 즐겨찾는 과일로 인기가 높다.

리즈(荔枝)
 중국 남부가 원산지이며 당나라 양귀비가 즐겨먹었던 과일로 더욱 유명하다. 양귀비에게 여지를 바치기 위해 많은 기수와 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리고 달리다 지치고, 쓰러지고, 죽었다고 한다.
여 지 열매는 둥글며 겉에 돌기와 더불어 거북의 등처럼 생겼으며 5~8월에 익는다. 맛은 시고 달며 독특한 향기가 있으며 중국 남부에서는 과일 중의 왕이라고 한다. ‘본초강목’에는 여지가 자양강장제로서 폐기능을 보강하고 소화기능을 원활히 하여 신경을 안정시키고 혈액을 보충한다고 했다. 온몸의 기능을 원활하게 해 피부를 곱게 가꾸어주는 효과가 뛰어나다고 한다.

롱옌(龙眼)
 남 부 열대지방에서 나는 과일로, 담갈색 껍질 속에 흰색의 부드러운 과육이 들어있고 그 속에 검붉은 씨가 들어있다. 씨가 용의 눈처럼 생겼다고 해서 용안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즙이 많고 달콤하며 조금 이상한 향이 난다. 처음 먹을 때 맛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여러 번 먹다보면 그 맛이 그리워지게 되는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과일이다. 영양이 풍부하다고 알려진 용안은 기혈을 돕고 피부를 곱게 가꾸어준다고 한다. 빈혈, 불면증, 건망증, 신경쇠약 등에 좋다고 알려졌다.

유쯔(柚子)
 유 쯔(柚子), 우리말로 ‘유자’지만 우리가 평소 알고 있는 유자와는 많이 다르다. 광시 사텐촌(广西沙田村)의 유쯔가 유명하며 산지 이름을 붙여서 사텐유라고 한다. 유쯔의 두텁고 푹신한 껍질을 벗겨내면 안에는 귤조각처럼 반달형의 조각이 있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속껍질을 벗겨내면 탱탱한 알갱이들이 나타난다. 단맛이 나지만 기타 과일의 단맛하고는 사뭇 다른 독특한 맛이다. 살짝 새콤한 맛이 함께 난다. 레몬보다 비타민C가 세배나 들어있다는 유쯔는 해독, 기침, 위, 폐를 돕는 기능이 있다고 하며 비타민P 함유량이 높아 심혈관질병에도 좋으며 피로를 덜어준다고 한다. 유쯔는 10~11월이 제철이다.

비파(枇杷)
 중 국 남방에서 나는 과일로 외형이 중국 전통악기인 비파(琵琶)를 닮았다고 해서 같은 음인 비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가을에 꽃봉오리가 생겨 겨울에 꽃이 피고 봄에 열매를 맺어 초여름에 익기 때문에 ‘4계절의 기운을 다 갖고 있는 과일’이라 불리기도 한다. 과육은 부드럽고 즙이 많으며 새콤달콤한 맛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졌다.
중의학적으로 비파는 폐를 돕고 위를 튼튼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고 하며 현대의학으로는 암을 예방하고 항암물질이 들어있다는 것이 증명돼 귀한 약재로도 쓰인다.

키위(猕猴桃)
 ‘중 국 과일의 왕(中华水果之王)’으로 불리는 키위는 환경오염이 없는 산시성저우쯔현(陕西省周至县)에 대규모 재배지가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키위는 녹색식품으로 지정돼 ‘중화치이궈(中华奇异果)’라 불리며 인체에 필요한 17가지 아미노산과 각종 원소가 들어있다. 체질 강화와 노화방지에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사람들이 키위는 뉴질랜드가 원산지인 줄로 알고 있으나 사실 동양에서 뉴질랜드로 전파된 것은 1세기 정도밖에 안된다. 키위는 8~10월에 무르익는다.

두리안(榴莲)
  중 국에서는 광둥 등 소수 지역에서만 재배되며 ‘과일중의 왕’으로 불리는 두리언이지만 한편으로는 지독한 냄새로도 유명하다. 좋아하는 사람은 ‘향기롭다’고 하고 대부분 사람들은 ‘냄새가 역하다’며 코를 움켜쥔다. 냄새가 심하여 호텔이나 비행기에 반입하지 못하게 할 정도이지만 일단 진짜 맛을 알게 되면 자꾸 찾게 된다는 신비한 매력을 가진 과일이기도 하다. 둥근 공모양의 두꺼운 껍질 위에 가시처럼 뾰쪽하게 돋아나있으며 무게는 2kg정도 나간다. 과육은 연한 황색을 띠며 독특한 향과 함께 단 맛이 난다. 4,5월에 꽃이 피고 8, 9월에 익는다.

복숭아(水蜜桃)
 복 숭아는 장쑤우시(江苏无锡)에서 나는 특산품이 유명하다. 과즙이 많고 향긋하고 진한 복숭아의 신선 달콤한 맛이 일품으로 꼽힌다. 우시 복숭아는 타이후(太湖)의 천혜적인 자연조건을 바탕으로 타이후 인근에서 널리 재배되기 시작했으며 크게 바이펑타오(白凤桃), 바이화타오(白花桃) 등 몇가지 종류가 있다. 특히, 관훙(笔管红)이라 불리는 복숭아는 표면에 크고 작은 붉은 점들이 찍혀있고 머리부분은 진한 붉은 색을 띠며 과즙이 풍부하고 맛이 달콤해 첫손가락에 꼽힌다. 생산량이 적어 더욱 귀한 품종이다. 상하이에서는 난후이 복숭아가 유명하다.

Tip 과일을 중국어로
망고 芒果 máng guǒ
양매 杨梅 yáng méi
파인앤플 菠萝 bō luó
바나나 香蕉 xiāng jiāo
코코아 椰子 yé zǐ
포도 葡萄 pú táo
귤 橘子 jú zǐ
감 柿子 shì zǐ
석류 石榴 shí liú

2010년 7월 20일 화요일

트위터 혁명



트위터 혁명 북리뷰

2010/07/20 13:01

복사 http://blog.naver.com/gong0453/40110819095

아주 잘 쓴 트위터 일반론과 사용법에 관한 책입니다.
여러권의 트위터에 관한 실용서 가운데서도 비교적 잘 정리한 책입니다.
저자가 이 분야에서 상당한 내공을 가진 인물이군요.

트위터을 입문하는 분이나 트위터를 이미 사용하고 있는 분들도
한 단계 자신을 업그레이드 하는데 활용할 수 있는 책입니다.

"아무 때고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접속하면
자신이 '팔로우'한 누군가가 항상 어떤 이야기를 트윗합니다.
바로 지금,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때로는 사진이나 영상,
음악 등 다영한 형태의 콘덴츠가 링크로 올라옵니다.
현재 세상의 흐름을 바로 눈앞에 펼쳐 보여주는 세계가 트위터에 있습니다.
게다가 그 세계에 여러분도 직접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에 '여러분'이 서 있는 것입니다."
-p.6

* 평가: ****(트위터 입문자 혹은 사용자를 위한 멋진 책)

2010년 6월 21일 월요일

더딥



딱 100페이지 되는 책입니다.
1시간 남짓하면 술술 읽어버릴 수 있는 책입니다.
책 내용도 아주 특별하지 않습니다.
잠 시 상식을 환기시키고 다시 한번 알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만 2천원을 들여서 살 만한 책인가?

그 건 세스 고딘이란 작가를 보고 결정을 내릴 일입니다.
아주 평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매력을 가진 소책자입니다.

세 상에서 최고가 되면 너무 보상이 크기 때문에 최고가 되라!
그런데 최고가 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큰 시련이 닥치는데 이를 작가는
'더 딥'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딥에서 대부분 포기하고 말지요.
그래서 승자와 패자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대 개 승자는 남들이 뭐라하든지 간에 이 상태에서 쎄게, 진짜 쎄게 밀어붙이지요.
패자는 '이젠 안 되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모든 경우에 이렇게 밀어붙여야 되는 가?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무 리 노력해도 상황이 그럭저럭 하는 상태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있는데
이때는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 평가; ****(강력한 추천, 주머니 사정이 괜찮다면)